kimseorim
허크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해변으로 나가곤 했다. 주로 혼자였지만, 가끔은 맥스와 함께일 때도 있었다. 모래사장을 따라 하염없이 거닐다가 먼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소금기 묻은 바람을 맞으며 방둑에 가만히 서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허크 자신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 확신하지 않았는데, 유예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래, 나도 인정해, 얀시는 브레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예거 파일럿 테스트의 결과도 그랬어. 나? 나야 미모 담당이지. 내가 기억하는 우리 둘의 조합은 미녀와 야수에 비견될 만하다고 생각했다고. 이 사진을 봐. 흠, 그래서 어디까지 했더라? 응, 형은 내겐 닻과 같은 존재였지. 모든 이들에겐 그런 존재가 있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도...
임수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어린 아이 둘을 무척 귀찮아했다. 어떻게든 수완을 발휘해 경예와 예진을 따돌린 채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는데 해 질 녘 금릉으로 돌아오는 길엔 언제나 경염, 예황과 함께였다. 경예와 예진은 얼른 나이를 먹어서 자신들도 형님, 누님과 함께 수련을 하고 놀러 다닐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훼방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경...
10년만에 돌아온 택스맨은 대뜸 빚에 대해 얘기했다. 사람은 남은 빚을 기억해야 한다고. 대체 누가 누구에게 빚을 졌다는 것인지. 마티의 입가에 경직된 주름이 잡혔다. '빌어먹을, 적어도 네겐 아니라고.' 오히려 이쪽에서 무엇이든 받아내도 시원찮을 판국에— 마티는 미련하기까지한 옹졸함이 지금까지도 자신에게 남아있었던가 생각했다. 러스트는 언제나 그랬...
소 공자, 경예, 짧은 포옹을 나누고 홀로 돌아온 후 줄곧 이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네가 그 날 나를 위해 어둡고 깊은 우물 안으로 내려가주었듯 나도 네게 그럴 수 있었더라면.
북 대유국과의 분쟁이 일단락되고 돌아온 이들 중 임수는 없었다. 임수를 떠나보내기로 했던 밤, 다시 돌아와 자신과 이 나라를 지켜봐달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각오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실로 닥친 후에야 그 각오는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다시는 어떤 기적으로도 수야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만이 남았다. 그날 ...
체코프가 입술을 지긋이 다물고 손가락을 올려 위를 가리켰다. 술루의 시선이 그 끝을 따른다. 하늘이 뚫려 있었다. 둘은 정방형의 하얀 방에 서 있었는데, 그곳에서 올려다본 그것은 뚫려있는 것인지 혹은 까만 점인지 깊이를 전혀 식별할 수가 없었고 검다는 표현조차 의구심이 들었다. 편의상 그저 커다란 어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것만 같았다. 그 단면...
―거울을 마지막으로 제대로 들여다본 게 언제였던가? 까칠한 턱을 괜스레 쓰다듬어본다. 아마도 캠프 마틸다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때였던 듯하다. 이런 시기에 잘도 면도령이 떨어졌군, 하고 브랫은 생각했다. 보급이 끊긴 팩 주스 대신 모래 먼지를 마시며 차폐물 뒤에 엎드려 전방을 주시한 지도 몇 시간이 지났다. 당장 시계를 보지 않더라도 태양의 위치를 보며...
나는 항상 술루의 곁을 맴돌고 있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384,400km나 되는 것만 같습니다. 마주하는 감정은 언제나 밀물과 썰물처럼 나를 휩쓸고 가지만 여기엔 실체가 없어서, 망원경으로 내 마음을 들여다본들 어떤 풍경이 보일까요? 물이 없는 바다의 파도를 누군가는 볼 수 있을까요? 이러한 소요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나의 언어로는 호소할 수가 ...
마티는 무심결에 결혼반지를 꼈던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보거나 오른손으로 그 자리를 매만져보곤 했다. 마치 반지가 아직도 거기에 있어 빙글빙글 돌려보기라도 하는 양. 러스트는 차가운 스테인레스 스틸 해부대 위에 누운 자신의 발가락에 John Doe라는 이름이 적힌 태그 고리가 끼워지는 것을 떠올렸다.
바네사가 변함없이 당근케이크를 만들어 면회를 왔다. 세스가 제일 좋아하는 크림치즈 프로스팅이 듬뿍 올려져 있었다. 사실 바네사의 다른 요리는—실력 여하와는 별개로—세스의 취향과는 달랐으나 이것만큼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바네사는 매년 그의 생일이 되면 이 케이크를 가지고 찾아왔다. 좀 더 자주 와서 보면 좋을 텐데. 바네사는 테...
나쁜 일이 일어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의 잘못이 결국 하늘에 의해 심판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마주하며 러스트는 각본에 따라 그들의 어깨에, 혹은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들은 자주 러스트의 손 아래 무릎꿇고 눈물흘리며 회개했다. 악한 이들이 살아남고 선한 이들이 죽어야 하는 현실에 정말로 균형은 있는 것인가? 결국 러스트...
마틴 하트는 심혈관계 질환으로 그의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라파예트 종합병원에서 별세했다. 이후 러스틴 콜의 행적은 또다시 묘연해졌는데 혹자는 사냥을 다녔다고, 혹은 텍사스에서 떠도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고, 또다른 이는 알래스카로 돌아갔을 것이라고도 했다. 몇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미시시피강 인근 들판에서 신원미상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는데,...
후텁지근한 날씨가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매기가 내어온 레모네이드의 얼음이 달그락 무너지며 녹았다. 러스트는 방충망 너머 정원에서 오드리와 메이시가 뛰어노는 것을 보았다. 매기는 러스트의 침묵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알록달록한 소꿉을 잔디에 늘어놓고 앉아 놀던 두 아이는 이윽고 무슨 일인지 투닥투닥 싸우기 시작했다. 매기가 종종걸음으로 정원으로 나갔다.
등 뒤에서 자신을 휘감아오는 깡마른 손 끝에 절어있는 담배 냄새와 몸무게와 함께 뭉근하게 누르듯 풍겨오는 퀴퀴한 체취에 마티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얼굴을 찌푸렸다가 생각했다. 어이, 뭘 기대한거야? 헛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나왔다. 매기나 리사와는 다르다.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파트너라는 이름으로 묶여 익숙해졌던 관계가 뒤집히자 얼마나 낯설게 느껴지는가 ...
마티는 이따금씩 러스티의 목줄기를 그대로 잡아 비틀어버리고 싶다는 거센 충동을 느꼈다. 구부정한 등을 앞으로 숙인 채 조용히 앉아있는 뒷모습을 보면, 슬그머니 다가가 그의 뒷목부터 부여잡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을 상상하고 있노라면 손바닥 아래 닿은 피부 너머 불규칙하게 꿈틀거리는 맥박까지도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의 더블 데...
붙잡아 줄 손을 기대하면서도 내칠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척 자신도 알고있었고 허크도 충분할 정도로 이해했지만, 문득문득 그들은 언성을 높이곤 했다. 물론 싸움은 항상 짧았다. 아비의 진심어린 호소와 그러나 서툴고 짧아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말들, 그 순간만 되면 문을 쾅 하고 닫는 아들, 침묵, 또 다른 침묵, 그 단절이 그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결...
겨울 낚시여행은 베켓 가의 연례 행사였다. 정확하게는, 베켓 가의 남자들을 위한 행사였다. 매년 시즌이 돌아와 식탁에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어머니는 언제나 손사래를 쳤다. 롤리는 군말 없이 곧잘 따라나섰지만 얀시는 아침부터 떠나는 일정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출발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아침잠을 방해받아 짜증이 엿보이는 미간 주름을 한 가닥 새긴 ...